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충남 홍주(현재의 청양)에서 태어나 1735년(영조11) 15세에 향시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세손 교육을 담담하고 영조의 장례를 진행하는 등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이후 정조의 측근이자 신임도가 매우 높은 신하로서 초대 화성유수(華城留守)를 역임하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수원화성 축성 시 총 책임자였다. 채제공 초상화 시복본(時服:문무백관이 공적인 업무를 볼 때 입는 옷)은 비단에 채색을 입힌 것으로 , 1791년 채제공이 73세 때 화사 이명기가 41세의 정조대왕의 어진을 그린 후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그린 것이다.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그려진 초상화인 만큼 한쪽 눈이 사시(斜視)였던 채제공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정조가 하사한 부채를 강조하기 위해 손이 그려진 것은 독특한 예라 할 수 있다.
조선경국전은 1394년(태조 3) 3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을 정리하여 왕에게 지어 바친 사찬(私撰)법전으로 1395년 처음 간행하였다.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의 6전(六典)체제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법전은 개인이 저술했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 제시한 국가 운영의 실질적인 설계도라 할 수 있다. 이는 후에 『경제육전』과 『육전등록』 등을 거쳐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의 『조선경국전』은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유일한 최고(最古)의 법전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대리청정(1749~1762)하던 시기인 1757년(영조 33)에 조돈(趙暾, 1716~1790)을 경기도관찰사로 제수하면서 내린 명령서다. 왕이 내릴때는 유서((諭書)라 하고 세자가 대리청정기에 내릴 때는 영서(令書)라고 지칭한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시기에 작성된 희귀한 문서로 규모나 형식이 다른 영서에 비해 매우 뛰어나다. 조돈은 영·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광서(光瑞)이며 호는 죽석(竹石)이다. 1740년(영조 16) 문과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대사가,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1796년(정조 20) 정조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파직한다고 친히 어필로 작성한 비망기(備忘記)다. 비망기란 왕의 명령을 적어서 승정원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다. 정조가 직접 쓴 비망기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례이며, 정조 말년의 원숙한 필체를 살펴볼 수 있다. 1788년(정조 12) 번암(樊巖) 채제공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약 100여년 만에 남인(南人)출신으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좌의정을 지내고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1795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조가 사간원 헌납 유하원(柳河源, 1747~?)을 유배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 채제공이 유하원을 두둔하자 화가 난 정조가 친히 어필로 비망기를 내려 채제공을 파직시켰다. 이 일로 채제공이 상소를 올려 견책을 청하자 정조는 채제공에 대한 믿음이 커서 책망한 말이 조금 지나쳤다며 위로하였다.
정조가 수원부사, 화성유수, 장용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太, 1740~1799)에게 보낸 어찰을 모은 첩이다. 어찰을 모은 첩이다. 어찰은 모두 13통인데 2통은 2장의 종이에, 나머지 11통은 1장의 종이에 썼다. 조심태가 수원부사로 임명된 1789년부터 장용대장으로 활동하던 1798년 사이에 정조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수우너을 중심으로 요동치던 당시의 정국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어찰첩이다. 어찰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는 수원에 있던 조심태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현지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처리해 나갔으며, 모종의 비밀 업무도 지시한 후 그 결과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조심태는 정조와 서로 밀서를 주고받던 핵심 측근 관료였다. 조심태는 1768년(영조 44) 무과 급제하고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쳐 1789년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때 현륭원(顯隆園)을 이장하는 일과 수원의 도시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일 등 어려운 임무를 차질없이 처리하였다. 이후 총융사, 금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내다가 1794년 승격된 화성유수로 다시 제수되었고 수원 화성 축성의 주요 직책을 겸하였다. 정조가 번암 채제공과 함꼐 가장 총애하던 무반계 신하였다.
정조가 처남인 박종보(朴宗輔, 1760~1808)에게 보낸 친필 어찰 19통을 노랑색과 분홍색의 고급색지를 사용해 궁중 장황으로 꾸민 중요한 어찰첩이다. 내용은 정조가 박종보의 안부와 궁궐 출입여부를 묻거나 하사한 선물의 목록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처남인 박종보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종보는 1787년(정조 11) 누이가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순조의 생모)이 되자 음보(蔭補:특별대우로 관직에 오름)에 등용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정조대 초대 화성유수를 지내고 영의정까지 오른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시문집 초고본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 현륭원 조성, 수원 읍치 이전, 수원화성 성역 등 정조가 추진하는 주요 사업을 맡아 수행한 인물이다. 1799년(정조 24) 1월에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채제공의 문집 편집과 간행에 큰 관심을 갖고 직접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했다. 표지 안쪽 면에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구본(舊本)을 정조가 정해 준 범례대로 다시 편집하고 3본을 베껴 서울, 영남, 충청도에 보내니 더 이상 내용을 바꾸지 말고 이 책을 기준으로 간행할 것을 당부하는 별지(別紙)가 붙어 있다. 총 62권 30책 가운데 표지의 우측 상단에 '권수(券首)라고 표기된 제1책을 포함하여 27권 22책만 전한다.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에게 직접 써서 내린 어필 5첩이다. 1739년(영조 15) 조현명에게 영조가 써서 내려준 사언구(四言句)의 칙유(勅諭)인 《대정일면유어서(大政日面諭御書)》 1첩, 1743년(영조 19)과 1745년(영조 21) 그리고 1746년(영조 22)에 조현명의 사직 상소에 대해 영조의 답변을 각각 써서 내려준 《수서비답(手書批答)》 등 3첩이다. 또한 조현명이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에 제수된 당일 영조의 진찰을 위해 입시하자 감회가 일어난 영조가 시를 써서 하사한 《주상전하어시어필(主上殿下御侍御筆)》 1첩이다. 서첩은 모두 무늬비단으로 꾸며져 있고 내지 앞뒤에 색종이를 붙이는 등 유사한 방식을 보인다. 각 서첩 겉표지의 제목 글씨는 모두 예서(隷書)로 쓰여져 있다. 서첩 내용의 어필은 영조 재위 시절의 전형적인 서풍을 보여준다. 조현명의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1719년(숙종 45) 문과 급제하여 영조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보호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졌다.